곡산 척 씨의 시조 척준경은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황해도 곡산 출신인 척준경(?~1144)은
고려 중기의 무신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가난한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다
그는 숙종(고려) 때 왕자였던
계림공의 눈에 띄어
종자가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1095년 숙종(고려)이 즉위하자
추밀원 별가라는
벼슬을 받으며 무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척준경은 윤관의 휘하에서
여진 정벌에 참여하여 1104년 여진족에게
패주 하던 임간의 군사를 구출한 것을 시작으로,
1107년에는 석성과 영주 전투에서
큰 승 리를 거두며
혁혁한 공을 세워 이름을 알리게 된다
특히,
100여 기의 여진 기병이 있는 곳에
단독으로 뛰어들어
적장을 사살하고 돌아왔다는 용맹함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고려의 무장으로 성장한다.
그는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그 외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후 권력욕에 눈이 멀어
권력욕이 강한 이자겸과
손을 잡고 조정을 장악하게 되며
이 들은
인종을 위협하며 횡포를 일삼았고,
급기야
1126년에는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고 왕에게 화살을 쏘는 등
반역 행위를 저질렀으나,
결국 인종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꿔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서 공을 세우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이후에도 권세를 믿고 전횡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된다.
결국
정지상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를 떠나고
유배지에서 17년의 세월을 보낸
척준경은
1144년 인종의 명으로 복귀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등창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척준경은
고려 시대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이자겸의 난에 가담하여
권력을 탐한 행적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비운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곡산 척 씨는
이미 사라진 성씨(망성)로 기록된다.
척준경의 흥망성쇠와 함께
고려 시대에 잠시 세력을 떨쳤으나,
이자겸의 난 이후 척준경 일가가 몰락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의 지리서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곡산 척 씨가 망성(亡姓),
즉 사라진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는
곡산 척 씨 성을 가진 후손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일가의 몰락 이후
세력이 약화되어 후손이 이어지지 못했거나,
다른 성씨로 흡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 조사에서
"척(拓)" 씨는 매우 희귀한 성씨로 분류되며,
곡산을 본관으로 하는
척 씨는 사실상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척준경의 삶은
뛰어난 무용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과,
삶은 개인의 뛰어난 능력 못지않게
올바른 처신과 시대적 상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by. 이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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