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黃進)
조선의 검객 무신 황진(黃進)
(1550-1593)
황진(黃進) 은 1550년(명종 5년)
전라도 남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장수(長水)이며,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무민(武愍)입니다.
황희(黃喜) 정승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황윤공(黃允恭),
어머니는
남양 방 씨(房氏)로
방응성(房應星)의 딸입니다.
1576년(선조 9년)
황진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무예 실력을 갖췄으며,
특히 활쏘기에 능했고
조선통신사 수행 시
일본 관리들 앞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였는데
모두를 놀라게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후,
거산도찰방(巨山道察訪),
안원보권관(安原堡權管) 등을 거쳤으며,
다시 선전관이 되어 1590년에는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의 종사관으로
일본 방문 후
왜의 침입 가능성을 예측하고,
1591년에는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부임하여
침략에 대비하여 무예를 연마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진(黃進)은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의 휘하에서
용인 전투에 참여했으나 패배하였고
이후
패잔병을 수습하여
진안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안덕원(安德院) 전투와
이치(梨峙) 전투에서
왜군의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이치 전투에서의 공으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조방장(助防將)에
임명되었습니다.
1593년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로
승진하여,
죽산성(竹山城)에서 왜군과 대치했고,
퇴각하는 적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사살하였습니다.
1593년 6월,
왜군이 제2차 진주성을 다시 공격해 오자
황진은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9일 동안
치열하게 항전했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고
황진은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사후
황진의 충절을 기려 선조는
그에게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했으며,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습니다.
남원의 정충사(旌忠祠)와
진주의 창렬사(彰烈祠)에 제향 되었으며,
묘소는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정송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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